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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랏말싸미에 대한 한글창제의 숨겨진 비밀과 역사왜곡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 임금님 사진과 배경
    영화 나랏말싸미포스터

    나랏말싸미 영화 한글창제 숨겨진 비밀

    영화 나랏말싸미는 조선의 위대한 군주의 세종대왕 이야기를 영화로 담고 있습니다. 이영화 나랏말싸미에서는 세종대왕이 아니라, 신미라는 스님이 한글을 창조했다고 역사 왜곡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어떤 논리로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는지 영화 속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미대사는 조선초기의 승려로 본명 김수성입니다. 신미 대사가 한글의 창제 다 주장과 근거는 바로 한 권에 책 때문입니다. 불교 고서 원각선종석보입니다. 원각선종석보는 1,430년 신미대사에 의해 출간이 되었는데, 이 불서에 바로 한글이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 연도는 훈민정음 창제시기 보다 8년이나 앞섭니다. 그래서 이 책을 두고 나온 주장이 신미 대사가 한글을 먼저 창조했고, 세종대왕 이를 참고하여, 반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미 대사가 한글창제설에 거론되는 또 다른 이유는 신미대사가 세종에게 시호를 받았게 때문입니다.

    바로 우국이세,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건데 이 시호를 두고 소수의 학자들은 한글 창제의 공도가 신미대사에게 있다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미 대사가 범어(산스트리 트어)에 능통했는데, 한글이 이 범어를 모방하여 창조했다고 소수학자들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범어는 인도의 고전어로 자음과 모움이 있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이 음운 체계를 따라서 한글이 만들어졌다고 소수 학자들이 주장을 합니다. 신미대사의 본적 영산김 씨의 족보에도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다고 나옵니다. 신미 대사가 역사에서 지워진 이유는 숭유억불의 정책에 따라 사대부들이 신미대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세종이 신미대사 보호하기 위해서 우국이세라는 시호만 내리고 그를 기록에서 지움으로써 보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미대사 한글 창제의 의문

    이런 주장을 근거로 만들어진 작품이 소설 천강에 비친 달 영화 나랏말싸미입니다. 그럼 진짜로 신미대사가 한글을 창제한 걸까요? 일단 언어영구소 박대종 소장에 따르면 원각선종석족는위작입니다. 책의 서체나 책의 제본이 15세기 조선의 서체 및 제본방법과 일치하지 않으며. 내용 또한 또는 초기 언어가 아닌 현대의 한국어가 들어가 있는 등 오류가 9가지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만들어 짝퉁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신미 대사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영산 김 씨의 족보 사료도 있지만, 족보라는 게 워낙 과장된 게 많아서 신뢰도가 낮으면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교서적이 활발이 간행되고, 세종이 말년에 불교로 귀의를 하고 세종의 아들 세조가 불교중흥정책을 펼친 것도 신미대사 영향력이 에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 또한 아전인수격입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언해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서 시호를 받았을 뿐 직접적인 연관성이 하나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미대사의 범어모방설도 수많은 문자모방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범어모방설, 티베트 문자모방설, 단군 조선의 가림토 문자 모방설등 각 모방설들은 통일되지도 않고, 잡다하게 난무하고 있고, 심지어 조선 최고의 음악가 박연희 훈민정음 창제를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증거는 무엇이 있을까요? 1443년 12월 세종 25년 실록에 임금이 직접 언문 28자를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숙주의 문집 보한채집에는 왕이 28자를 만들고 언문 했다. 기록이 있습니다. 한글이 반포되고 3년간 집현전 학자들을 훈민정음해례본을 만드는데 동원되었으며, 해례본과 서문에도 전하 창제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 음을 모두 한글로 옮겨 적은 동국정운의 선문에서도 신숙주는 성과 음 하나하나를 정함에 모두 세종대왕의 재가를 받았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후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팔도 최고의 학자들만 모인 집현전에서 부제학을 맡은 최만리도 세종과의 언어학 논쟁에서는 말도 못 꺼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경연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조선 최고의 언어학자였습니다. 숭유억불 정책이라서 신미대사가 배제되었다는 추측 또한 수용되기 어려운 이유가 고급운희거요를 번역하는 <운희번역>에도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일을 감독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사대부의 정사에서 감춰져 기록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세종의 한글 창제를 감췄으면 감췄지 신미 대사를 숨길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이상한 주장들이 나올까요? 모든 역사에 100% 란 없습니다. 하지만 99%의 사실을 두고 1%의 흥미로운 음모론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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